방금까지 계속 구인 구직을 찾아보고 있었고 마음에 들지 않아서 화를 느끼고 좌절했다. 내가 없는 것을 요구하는 공고들이 많아서다.
- 따는데 2년이 걸리는 상담 자격증
- 이미 상담/강사 활동한 경력
없어서 못하는 나
를 만나면 그렇게 화가 날 수가 없다.
그리고 저걸 요구하는 사람들이 미워진다. 이유없이 공격받은 것 같고 저 사람들이 날 화나게(가해) 한 것 같아진다.
이 때가 가장 함정에 빠지는 순간이다.
아무도, 아무도 날 공격하지 않았다. 내가 받은 것도 공격이 아니다. ‘일부러 날 특정하고 한 행위’가 아니다.
지금 느끼는 2차 3차 정서들로 인한 ‘합리화’ 페이크를 아는일은, 사실을 밟는 것으로 가능하다.
사실은 뭘까? 사람을 대하는 일에 자격을 통해 최소한 검증된 사람을 구하고 싶은 것은 나 같아도 그럴 것이다.
그럼 그들이 날 공격하지 않았다면, 내가 느끼는 이 좌절감과 분노의 정서는 무엇일까?
나는 왜 가해자를 만들기로 선택했을까?
만약 내 눈 앞에 막막함과 좌절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안 되는 방법을 그만 두고 되는 방법을 취하도록 도와주고 싶지 않을까?
해주고 싶은 것은
- 불안을 증폭하는 활동을 중단하는 것.
- 스스로 좋아하는 느낌을 따라 살도록 함께 해주는 것
구체적으로 중단할 것은
- 그들이 원하는 자격증이 없는데 꼭 그 자격을 요구하는 곳에 지원하지 않는 것.
- 다른 활동을 병행하고 싶으면서 전일제를 요구하는 직업 공고만 찾지 않는 것.
- 주도적으로 돈을 벌고 싶은데 수동적으로 돈을 벌어야 하는 직업을 바라지 않는 것.
구체적으로 하고 싶은 일은
- 일용직 일 찾아서 하기
- 부부치료 책 읽기
- 독서치료 프로그램 만들기
- 약한 부분 재활운동하기
모든 두려움이 없는 상태 같은 것은 아주 일시적으로 찾아온다.
익숙해지면 ‘행복’이 아닌 권태가 된다.
권태는 왜 그런지 모르는데 흘러가던 데로 흘러가는 상태다. 옆에서 세찬 파도가 쳐도 나는 나만의 세계에서 주변 사물들을 그저 관찰할 뿐이다. 내게서 아무 에너지도 발생하지 않고, 나는 아무 감동도 느끼지 못한다. 애를 써도 예전과 같지 않다.
권태 자체는 아무런 힘이 없지만, 권태라는 ‘정체’ 상태는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거기서는 ‘나’를 느낄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살아있다는 감각을 잃기 때문이다.
아… 내가 느끼던 것이 권태였나?
통장의 잔고가 줄고 나는 압박을 느끼고 자꾸 풀타임 잡을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권태를 느끼냐고 생각했는데…
내가 느끼는 것은 ‘정체’감과 ‘상실’이고… 이는 권태감과 같다.
정체됐다고 느끼기에 일을 만들어 뭔가를 ‘했음’을 추구하고…
상실됐다고 느끼기에 뭔가를 계속 가지고 채운 상태가 되려고 한다.
수학 공식같이. 그렇구나.
정체와 상실감은, 감동이 없는, 즉 내가 위험을 거부하기에 필연적으로 생동감이 상실된 상태라서 그런것..
즉, 가고 싶은 산길이 두렵고, 그래서 두려움을 피하려고 아예 산길을 가지 않고 머물기만 하니 생동감이 없고, 계속 산길을 생각하니 좌절만 하겠구나..
좌절하기로 선택한 것은 ‘나’다.
그럼 이제 뭘 잘 ‘해내는 것’ 자체만 매달릴 필요도, 무언가를 ‘많이 가진 상태’에 목마를 필요가 없구나…
아무리 많은 것을 하고, 아무리 많이 가졌다고 생각을 해도 이 권태감이 사라지지않을테니…
그럼 지금 가고 싶은 곳은 어디고, 그 산길을 가기 위해 당장 무얼 하고 싶을까?
이 불안이라고 불리는… 가슴이 뛰는 현상은 즐거움으로 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