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들
그것은 선택의 결과로 인한 ‘사실’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블로그 글의 주제
- 집 책장에 꽃힌 책
- 읽는 글들의 주제
방어기제 너머의 실존적 질문
방어적인 목소리는 “익숙해서 그래”라고 말한다. ‘잘못하지 않았다’라는 면피를 주장하고자 하는 목소리. 동시에 그런 익숙한 나를 이해못하는 ‘너’가 잘못했다고 타자를 뭉개버리는 목소리다.그리고1 실존적인 목소리는 “그럼 어떻게 살고 싶은데?”라고 말한다.
20대 초반부터 블로그를 해왔으니 10년이 넘게 블로그를 해왔고, 주로 컴퓨터 관련 주제를 포스팅 해왔다. 익숙한 것은 당연하고 다른 행동이 생소한 것도 당연하다.
익숙하거나 생소한 ‘정서’는 내가 싸울 어떤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건 사실이다.
익숙한 것 밖에 몰라서 하고 싶은 것을 못하는 답답한 사람의 느낌을 ‘아는’ 것.
그저 지금 살고싶은 느낌을 살기로
선택
하려면 블로그 소프트웨어 앞에 나
에게는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싶다.같은 행위 다른 마음
과거의 습관이 주는 불안의 안티 테제로서 반항하고 도망치려는 모습의 글쓰기가 아니다.지금 현재 살고 싶은 느낌에 필요한 것을 스스로에게 충실히 제공하고 누리려는 모습의 글쓰기를 하고 싶을 뿐이다.
마음의 다른 모습
익숙함을 피해서 불편함을 선택하는 ‘행위’는 같을 수 있다.
하지만 개인이 자신의 ‘선택’을 인지하고 ‘현재 살고 있는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즉, 고통이 자신의 현재 행위를 선택하게 한 외부 요인과 삶의 의미가 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후자는 신경증2을 겪게될 확률이 높다.
- 고통으로 부터 도망치는 자는 등뒤에 고통을 늘 날카롭게 느끼고 있기에 일상생활을 하면서 계속 인지하고 싶지 않지만 무의식적으로 불안감을 느끼게 되고
- 고통이라고 추방시키려는 것이 ‘마주치고 싶지 않은 자신’이기 때문에 도망가는 것도 추방시키기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좌절감과 절망감을 느기게 된다.
- 자신을 돕지 않고 버리려는 작용 때문에 버려진 자신은 도와달라고 소리치며 무의식적으로 계속 역기능적인 역동을 일으키고 버리고 도망가려는 자신은 그 역동을 억누르고 방어하느라 에너지가 소모되어 일상생활이 위축되거나 어렵게 된다.
- 경직된 자아상 때문에 삶의 다양한 순간들의 요구에 적응하지못하고, 타자에게 싫은 나를 투사함으로써 관계맺는 것이 힘들어진다. 일을 잘 하고 돈이 많고 사람들과 관계를 잘 맺는 스킬을 가졌더라도 그 내면에서는 신뢰할만한 관계 맺기를 어려워하고 동시에 누군가를 늘 미워하고 저주하느라 에너지를 사용하게 된다.
대상이 없는 감정 ‘불안’
‘공포(fear)’는 대상이 있다. ‘불안(anxiety)’은 대상이 없다. 신경증을 겪는 사람이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은 자신이 인식하고 싶어하지 않는 ‘자신’이 억압된 상태이기 때문에 불안으로 인식된다.
혹은 불안에 대한 합리화 혹은 투사 작용으로 외부의 다른 대상을 설정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페이크다.
삶의 제한점 수용
실존이 인본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한계’를 인식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늘 ‘피투성이’로 삶에 던져진 ‘인간’이다.그래서 용서와 이해가 가능하다.
두려움
“넌 왜 그것밖에 못해?”라는 말에는, 상대방에 대한 기대가 담겨 있다.
“난 왜 그것밖에 못해?”라는 말에는 실제 자신보다 더 부풀려진 신적인 자신에 대한 기대가 담겨 있다.
그걸 못하면 안 된다는 ‘두려움’…
신학자 폴 틸리히는 두려움은 3가지 형태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첫째는 존재론적 두려움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가 대표적이다. 둘째는 목적론적 두려움으로 소망을 이루는 게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다. 셋째는 도덕적 두려움으로 이중적 삶을 살 수밖에 없는데 대한 양심적 고뇌이다.
이상적 자아가 못 되면 자신에게 주어진 사랑이 철회되고아무 의미없는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두려움.
이상적 자아가 되지 못하면 직면하게될 공허에 대한 두려움.
이미 이상적인 올바른 자아와 스스로 추악하다고 생각하는 현실의 자아로 이중적 삶을 실제로 살게되면서 스스로 자기검열하고 타인의 눈에 민감하게 살게되는 두려움.
틸리히는 이 두려움에 대해서 다음 처럼 말한다.
너는 받아들여졌다. 너는 받아들여졌다. 너보다 더욱 위대하고, 네가 이름을 알지 못하는 그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지금 그 이름을 알려고 하지 말아라. 나중에 그 이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지금 무엇을 하려고 애쓰지 말아라. 나중에 너는 더 많은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어떤 것도 구하지 말아라. 어떤 일도 행하지 말아라. 어떤 계획도 세우지 말아라. 그저 네가 받아들여졌다는 그 사실만 받아들여라! 만일 그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다면, 우리는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다. - 폴 틸리히우리가 피투성이인 채로, 이 세상에 현재 존재하고 있는 사실을, 이 세상이 우리를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리고 죽을 때 까지 온전히 받아들였다는 느낌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받아들여짐
우리의 제한점도 수용됐다. 제한점도 존재해도 괜찮다. 이상적 자아만 존재하고 일상적 자아는 없어져야 하는 것이 아닌, 그 자아도 지금 ‘나’라는 감각에 포함된다.
시작점은 이제 부풀려진 자아가 아닌, 지금의 나다.
부풀려진 나와 실제 나와의 차이점이 -100이라면, 한계 때문에 -100 만큼 계속 고통을 받는다.
한계가 수용된 모델에서는 한계는 이미 수용됐으므로, 0이다.
내 힘은 한계를 부수고 한계 때문에 울고 좌절하는 감정을 다잡는 대신, 다 잊고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 곳에 쓰이게 된다.
고통
믿음에 대한 틸리히의 말을 보자
Being religious means asking passionately the question of the meaning of our existence and being willing to receive answers, even if the answers hurt. - 폴 틸리히자신이 수용됐음을 믿고, 내가 존재하는 이유를 끊임없이 탐구하는 것이 종교적이 됨을 말한다.
그리고 종교적이 됨은, 응답이 아플지라도 기 꺼이 그 응답을 받고자 하는 것이다.
즉, 나는 제한점을 가진 존재로 세상에 이미 받아들여졌고, 내가 이 주어진 삶을 살기로 ‘선택’하는 것으로써 내 존재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세상에 질문을 하게 된다. 그리고 세상에서 고통과 환란이 올 지라도 삶을 ‘선택’하는 것이 내가 세상에 이미 받아들어졌다고 믿는 것이다.
슬픔, 화, 좌절 등이 없는 세상은 없다. 내 제한점이 세상에 온전히 수용된 것 처럼 나도 세상에 그런 것이 존재함을 수용한다.
지금 좋아하는 것을 공부하고 그것과 관련된 일을 하며 살아가기로 ‘선택’한 나는, 인간으로서 많은 제한점을 가지고 있다.
돈이 부족할 수도, 사람을 못 만날 수도, 시선들에 낙인찍혀 낙심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고통이 더 많은 상황에서 삶이 끝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것을 계속 공부하기로 ‘선택’ 함으로써 세상이 나를 수용했다는 것, 내가 여기 존재하는 의미가 있음을 계속 물어볼 것이다.
프로그래머, 심리상담사와 같이 어떤 정체성에 갖히는 것이 아닌, 그저 사랑하는 것을 따라가는 존재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