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없는 창피함 탐구

watch_later 화요일, 6월 13, 2017

Q. 누가 날 돈으로 살짝이라도 무시하면 왜 이렇게 모멸감과 분노가 일어나는 걸까?

A. 모멸감이라는 곱상한 껍데기를 벗겨내면, 창피와 수치라는 감정이 드러난다.

“너는 안 그런 줄 알아?”라는 발화는 거기에 ‘창피함’이 있다는 것과 창피함을 느끼기 싫어하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창피함을 떠미는 방식으로 나만 괜찮아지고 싶어 함을 드러낸다.

하지만, 창피하다는 유치한 감정과 창피한 나로부터 도망가는 모습이 드러나지 않으면. 그저 정치적으로 나는 올바른 상태를 만들기 위한 싸움만 이뤄진다. 대화가 빙빙 돌기만 하고 관계는 나빠진다.
너는, 나를 수치스럽게 한 네가 아닌, 이미 수치스러운 나와 같은 너, 즉 나다.

예를 들어보자.

돈 없는 자신이 되면 수치심(적절한 내가 아님)을 느끼고 죽을 것 같아서, 어떻게든 돈 버는 자신의 정체성만 고집하는 자가 있다고 하자.
그는 돈 있는 자가 되기 위해서, 늘 돈 없는 자를 만들어낸다. 돈 없는 자를 깔아뭉개는 순간에만 돈 있는 자기를 만날 수 있으니까.

온 순간을 ‘나도 살아있을 자격이 있어!’라고 외치기 위해서 돈을 벌고 타자를 밟는 그는, 늘 자신을 공격하고 자신을 밟음으로써 정의된다.

Q. 그는 왜 돈 없는 타자를 공격하고 쫓아내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고정하려 하는 것일까?

A. 돈이 없을 때, 그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타자로부터 느낀 수치심이 너무 아파서, 그런 자신이 되지 않기 위해서, 증오하고 미워하고 자신의 삶으로부터 추방하려는 움직임으로 그가 돈 있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즉, 돈이 없는 자신은 ‘죽음’이고 돈 없는 자신은 타자에게 뒤집어씌움으로써 죽음을 몰아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는 타자를 업신여기고 우월한 자신을 만들지만. 실제로는 늘 타자(돈)를 두려워하게 된다. 사람을 돈이자 죽음을 가져다주는 존재로 여기게 된다.

Q.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돈의 사망 권세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A. 짓밟고 밖으로 내쫓으려는 그자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간절한지 안다면, 짓밟혔을 때의 자신도 그저 안아주고 알아줄 수 있다.
삶에서 생존을 위해 가장 중요했던 그자(부모, 연인, 친구, 스승 등)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그자가 들었던 채찍을 그대로 들고 자신 자신을 채찍질하는 한은…. 조건 없이 그저 받고 싶었던 사랑은 영원히 만날 수 없다.

돈이라는 채찍으로 맞으면서 두려움으로 바닥에서 벌벌 떨고 있는 자신을 일으켜주고 안아주고 함께 소리 내서 울면,그제야 우리는 채찍으로 인한 죽음의 두려움이 아닌, 돈 없이도 나를 일으켜 먼지를 털어주고 내 맘과 같이 슬퍼해 주는 현실을 만날 수 있다.

동시에, 내가 죽어도 맡기 싫어했던 그 무거운 짐을, 나를 위해 그가 맡아주었음을 고마워하게 된다. 잘난 자는 못난 자 없이 성립할 수 없고 부자는 빈자 없이 성립할 수 없다. 내가 지금까지 나로 존재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내 짐을 묵묵히 맡아 주었기 때문이다.

결국, 역설적으로 그가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그가 죽을까 두려워 몰아내고 공격하고 죽이려 했던 그 ‘타자’를 만나고 그에게 두려움을 고백하고 진정 내가 몰랐던 그를 알아가는 발걸음 속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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